고진영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역사를 새로 쓰며 우승을 자축했다. 고진영은 3월 6일(한국시간) 싱가포르 센토사 골프클럽 탄종 코스(파72)에서 열린 LPGA투어 HSBC 위민스 월드 챔피언십(총상금 170만 달러) 최종 라운드에서 6언더파 66타를 쳐 4라운드 합계 17언더파 271타로 정상에 올랐다.

고진영은 이번 시즌 첫 출전 대회를 우승으로 장식하면서 통산 13승 고지에 올랐다. 전인지는 4라운드에서 3언더파 69타를 쳤고, 이민지는 데일리 베스트인 9언더파 63타를 몰아쳤다. 고진영은 작년 11월 시즌 최종전 CME 그룹 투어 챔피언십 우승에 이어 2연승이다. 더불어 최근 참가한 10개 대회에서 6차례나 정상에 오르는 등 초강세다.

고진영은 우승뿐 아니라 ‘15라운드 연속 60대 타수’와 ‘30라운드 연속 언더파’라는 두 가지 신기록을 세웠다. 60대 타수는 작년 BMW 챔피언십 2라운드부터 이어왔고, 지난해 에비앙 챔피언십 4라운드부터 언더파 스코어 행진을 계속했다. 특히 두 기록 모두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을 넘어선 것이라서 의미가 컸다.
연속 라운드 60대 타수 종전 기록은 소렌스탐, 유소연(32), 그리고 고진영의 14라운드였고, 연속 언더파 라운드 종전 기록은 소렌스탐과 리디아 고(뉴질랜드), 고진영의 29라운드였다.
고진영은 이번 우승으로 세계랭킹 1위 장기집권 토대를 든든하게 다졌고, 상금왕 4연패에 힘찬 시동을 걸었다.

압박감 속에서 증명한 ‘기록’
경기 후 고진영은 “압박감 속에서도 기록을 깨서 나 자신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 더없이 기쁜하루”라면서도 “어떤 것이 부족한지 스스로 잘 알았기 때문에 1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뭘 해야 할지 깨달았다. 한국에 돌아가서 열심히 연습할 생각이다. 골프를 좀 쉽게 치면 좋겠다”고 욕심을 드러냈다.
앞서 시상식에서 고진영은 “나 자신과 싸움에서 이긴 내가 자랑스럽다. 꿈만 같다”고 말했다.
석 달 넘게 경기에 나서지 않았지만, 고진영의 샷과 퍼트는 여전히 예리했다.
특히 고진영은 코스 난도가 더 높은 후반에 더 강했다.
앞선 1∼3라운드에서 후반 9개 홀에서 33타-34타-33타를 쳤던 고진영은 이날도 후반 9개 홀에서 32타를 적어내며 역전극을 펼쳤다. 특히 13번 홀부터 18번 홀까지 6개 홀에서 버디 5개를 쓸어 담았다. 경기 초반에는 고전했다.

전인지에 1타 뒤진 채 시작한 최종 라운드 7번 홀까지 고진영은 버디를 하나도 잡아내지 못해 우승 경쟁에서 밀려나는 듯했다.
이정은(26)과 전인지, 아타야 티띠꾼(태국)이 버디를 쓸어담으며 저만치 앞서나갔다. 8번 홀(파5)에서 버디 물꼬를튼 고진영은 9번 홀(파4)에서 버디를 보태며 추격에 시동을 걸었다.
고진영은 2번 홀(파4)에서 두 번째 샷이 그린을 벗어나 1타를 잃고 선두에 3타차로 밀렸지만 13번 홀부터 16번 홀까지 4개 홀 연속 버디 쇼를 펼치며 공동선두로 치고 올랐다.
특히 15번 홀(파3)에서는 5번 아이언으로 친 티샷이 그린을 살짝 지나갔지만, 홀에서 10m 넘게 떨어진 프린지에서 퍼터로 볼을 굴려 버디를 잡아냈다.

승부사 고진영, 18번 홀에서 쐐기 박아
고진영은 승부사답게 18번 홀(파4)에서 쐐기를 박았다. 이정은과 공동 선두로 18번 홀(파4)을 맞은 고진영은 페어웨이에서 핀을 보고 곧장 아이언을 때린 뒤 내리막 3m 버디 퍼트를 집어넣어 승부를 갈랐다.
7일 귀국하는 고진영은 닷새가량 휴식과 샷 점검을 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25일부터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개막하는 JTBC 클래식에서 시즌 2승과 기록 연장에 도전한다.
이정은은 18번 홀 티샷이 오른쪽으로 밀린 데 이어 벙커와 러프를 오간 끝에 더블보기를 적어내 2위마저 놓쳤다. 버디 5개를 뽑아내며 3타를 줄인 이정은은 5언더파 67타를 친 티띠꾼과 함께 공동 4위(14언더파 274타)에 만족해야 했다. 앞서 티띠꾼은 17번 홀(파3) 보기로 우승 경쟁에서 떨어져 나가고 전인지는 16번 홀(파5) 이글 퍼트를 놓치면서 추격의 동력을 잃었다.

부활 알린 전인지
이번 대회의 주인공은 고진영 말고도 또 있다. 바로 전인지다. 이번 대회에서 내내 리더보드 상단에서 우승 경쟁을 이어간 그는 최종 라운드에서 3타를 줄이며 최종합계 15언더파 273타로 이민지(25·호주)와 함께 공동 2위로 대회를 마쳤다. 전인지는 LPGA투어 통산 3승 보유자다. 2012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 화려하게 등장해 2016년 LPGA투어 신인왕과 최저타수상을 휩쓸며 대세로 자리잡았다. US여자오픈, 에비앙챔피언십 등 큰 대회에서 강한모습을 보이며 ‘메이저 퀸’으로 불렸다. 하지만 2018년 이후 우승 소식이 끊기며 슬럼프가 시작됐다. 그는 올해 초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잘하고 싶은 마음과 주변의 기대 때문에 스스로 높은 기준을 세워놓고 그걸 채우지 못해 자책하는 마음이 큰 시기였다”고 했다. 골프를 접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조금씩 부담감을 덜어내며 골프의 즐거움을 되찾았다. 지난 시즌 우승은 없었지만 톱10에 아홉차례나 들며 샷감을 되살렸다.
올 시즌 세 번째로 출전한 이번 대회에서 전인지는 완벽한 부활을 알렸다. 지난 5일 3라운드에서는 보기 없이 버디 6개를 몰아치며 단독 선두로 올라섰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컨디션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3라운드를 마친 뒤 “지난 이틀 동안 목에 담이 들어 기권을 고민할 정도로 고생했다”며 “1라운드때는 기권까지 생각했는데 3라운드가 끝나고 나니 좋은 위치에 와 있었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챔피언조로 최종 라운드에 선 전인지는 시종 침착한 플레이로 우승 후보 자리를 지켰다. 후반 들어 같은 조의 고진영이 버디를 몰아치는데도 자신의 페이스를 지켰고, 공동 2위로 올 시즌 최고 성적을 올렸다. 3, 4라운드 동안 버디를 10개 잡고 보기는 1개로 막았다. 올해로 정규투어 데뷔 10년을 맞은 전인지는 “올 시즌을 앞두고 부담감을 내려놓고 마음이 아주 편해졌다. 매 홀, 매 과정을 즐겁게 치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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